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는 조선 전기의 명장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남이 장군은 뛰어난 무공과 비범한 능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어 27세의 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한 비운의 인물로, 그의 삶과 죽음에는 다양한 설화와 귀신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남이장군 설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귀신을 쫓아내 권람의 딸을 살린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이 설화의 주요 내용입니다.
권람의 딸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남이 장군은 우연히 하인이 이고 가는 보자기 위에 하얀 얼굴을 한 사악한 귀신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남이 장군은 이를 수상히 여겨 그 하인을 따라 권람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이 장군이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보니, 과연 그 귀신이 처녀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남이 장군이 방에 들어서자 귀신은 그를 보자마자 곧 달아나 버렸고, 처녀는 점차 숨을 쉬며 생명을 되찾았다. 하지만 남이 장군이 방에서 나오면 다시 처녀가 죽어가고, 그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남이 장군은 자신이 본 바를 권람에게 이야기하고, 약을 써서 마침내 처녀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이 일로 인해 권람은 딸을 살려준 남이 장군에게 깊이 감사하여, 그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설화에서 남이장군이 귀신을 쫓을 때 복숭아가지를 사용하는데, 이는 귀신이 복숭아나무를 두려워한다는 민간신앙과 연결된다.
남이장군의 이러한 능력은 민간에서 ‘귀신도 두려워하는 영웅’이라는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남이장군의 활동사항
남이(南怡)[1441~1468]는 1441년(세종 23) 태어났다. 20세인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도 선발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하여졌다.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의 여진 토벌에서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하여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한 공으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8년(세조 14)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하였으며,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예종이 즉위하여 포폄(褒貶)을 당하여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국문 끝에 능지처사 당하였다. 남양에 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묘소위치
남이장군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남이장군묘는 조선 초기의 묘제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묘역은 부인과 함께 매장된 쌍분(雙墳)의 형태로, 후대에 다시 정비한 것이다. 묘제(墓制)는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으며, 석물은 옛 것과 새 것이 섞여있다. 봉분 옆에 있는 묘표(墓表)는 1971년 새로 건립한 것이며, 봉분 아래의 둘레석·혼유석(魂遊石)·상석·향로석·망주석은 현대에 추가한 것이다. 묘역 하단의 문인석 1쌍은 조선 초기의 형태이다. 문인석은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인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이며, 두 손은 소매로 가려 홀을 쥐고 있다. 각진 어깨와 평면적인 옷주름 표현은 15세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민간 신앙과 남이 장군
남이장군은 귀신을 쫓는 영웅으로서, 무속신앙에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신령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남이장군의 화분만 보아도 귀신이 도망간다는 속설은 그의 설화가 민간신앙과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
남이장군과 귀신이야기의 상관관계는, 남이장군의 비범함·영웅성·신통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삶과 죽음에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 민간전승의 대표적인 서사 구조다. 귀신 모티프는 남이장군 설화의 핵심적 상징이자, 그를 민중적 영웅이자 신령으로까지 확장시키는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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